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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삶/마음 건강

의식수준과 깨달음 2

by 마린 요정 2020. 12. 2.

도인이 오해를 받는 이유

의식수준은 두뇌의 인식방식 혹은 세상사를 해석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의사소통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의식수준이 비슷한 사람들끼리는 같은 사건을 비슷하게 해석하기 때문에 의사소통이 잘 되고 따라서 쉽게 친해지게 된다. 반면, 의식수준이 서로 다를 경우 말하는 사람의 의사나 감정이 듣는 사람에게 잘 전달될 수 없어 답답함을 느끼게 되고, 따라서 서로 친구가 되기 어렵다.

 

의사소통의 문제는 자신의 의식수준이 상대적으로 낮을 경우 더욱 심각해진다. 사람들은 자신보다 높은 의식을 가진 사람들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데, 이는 아직 그들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의식의 경지에 있는 사람들의 심리적 상태를 제대로 파악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 사람들은 자기의 의식수준보다 낮은 수준의 사람들은 잘 이해하는데, 이는 그들이 그 낮은 단계의 의식을 이미 경험해 보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극히 이기적인 사람의 경우 어떤 사람이 왜 자신의 이익은 팽개치고 남을 위해 살겠다고 설쳐대는 지를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남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은 이기적인 삶을 영위하는 사람을 잘 이해한다.

 

 

의식수준의 차이로 인하여 예부터 성인들의 말씀은 제자들에게 조차 제대로 전달되기도 어려웠고 또 제대로 전달된 경우에도 후세 사람들이 다양한 해석을 붙이기도 한다.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비교적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불경의 경우에도 시대에 따라 그 내용은 상당히 달리 해석되어 왔고, 예수의 말씀과 행적을 기록한 신약성경의 경우는 더욱 심하여 어떤 신학자의 해석이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메시지로 변하기도 한다.

 

이것은 시대적 상황이 변하기 때문에 해석이 달라지는 측면도 있겠지만, 성인들의 말씀이 그 높은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제자나 학자들에 의하여 해석될 때 잘못 이해되어 주로 발생하는 것으로 보인다.

 

도인과 성인은 그들의 높은 의식수준으로 인하여 그 사고방식과 언행 면에서 일반인과 크게 다를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깨달음의 경지에 접근하였던 도인들은 일반인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조용한 곳에 은거하며 여생을 보낸 경우가 많았다.

반면 성인은 자신의 깨달음을 바탕으로 세상을 교화시키고자 노력하였지만 의식수준의 차이로 인하여 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다수의 일반인들로부터 멸시와 박해를 받는 경우는 허다하였다. 심지어는 법과 규율을 어겼다는 명목으로 혹은 미풍양속을 해쳤다는 이유로 추방 혹은 처형당하기도 하였다.

 

 

 

 

깨달음과 그 오해들

사람들은 깨달았다는 표현을 자주 쓰고 또 수행하는 사람들은 깨달음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한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 필요가 있는 것은 현재 쓰이고 있는 깨달음이란 말은 완전히 다른 두 가지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일상의 생활에서 어떤 것에 대하여 확실히 알게 될 때 우리는 흔히 깨달았다는 표현을 하는데, 이것이 통상적 의미의 깨달음이다.

반면, 영적 구도자들이 전통적으로 추구해 온 깨달음이란 영적 성장을 계속하다 보면 이르게 되는 특별한 의식수준, 혹은 좁은 의미의 깨달음을 의미한다. 대선사께서 역설하시는 전 인류의 깨달음도 ‘확실히 알게 됨’을 의미하는 넓은 의미의 깨달음인 것으로 생각된다.

 

구도자들이 이야기하는 좁은 의미의 깨달음은 호킨스박사의 수치상으로 볼 때 700의 의식수준을 이야기하는데, 예로부터 사람들은 이에 대해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여 왔다. 이것은 우주의 본성과 하나되는 상태, 모든 것이 밝아지는 상태 등으로 표현될 수 있고, 우주와 인생의 의미를 확실히 알게 되어 집착에서 벗어나고 분별심이 없어지는 상태를 이야기한다.

 

이 상태에 도달하면, 우리 모두가 천지기운에서 나온 하나임을 머리가 아닌 몸으로 알게 됨으로써 분별심은 사라지게 되고 만물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게 된다.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하는 우주의 원리를 알게 되고 인생이란 오직 영적 성장을 위한 것임을 확실히 알게 됨으로써 이제까지 지녀온 집착들에서 벗어나고 가족과 친지에 대한 애착에서도 벗어난다.

 

또한 세상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게 되면서 희로애락의 감정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일도 없어진다. 감정의 기복이 점차 사라짐에 따라 마음은 거의 내내 평온을 유지하게 되고 부질없는 걱정에서 해방된다. 또한 감정이 만들어내는 탁한 기운이 없어짐에 따라 건강상의 문제는 자연히 해결된다.

 

하지만 아직까지 많은 사람들은 깨달음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잘못 추구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어떤 사람은 깨달음이란 반드시 기(氣)적인 체험을 수반하는 것으로 여기고 또 영적인 능력을 개발하는 것이 깨달음의 지름길인양 생각한다. 일부 사람들은 영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을 도인이라 부르며 존경하고 따르기도 한다. 최근에는 오랫동안 수련을 하고 있는 모 교수는 자신의 수련 경험을 근거로 깨달음이란 없다는 주장을 펴기도 하였다.

 

 

깨달음에 대한 이러한 잘못된 인식들은 몇 가지 이유에 그 원인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제까지 깨달음의 경지에 올랐던 사람들이 워낙 드물었을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이 깨달은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쉽게 분간할 수 없었고, 또 수도(修道)하다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이 깨달은 자의 행세를 함으로써 빚어진 결과로 보인다.

 

깨달음이란 근본적으로는 의식 측면에서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고, 인간의 다른 성품과 습관 그리고 육신의 갑작스런 변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물론 우주의 본성을 깨닫게 됨에 따라 분별심과 집착이 없어지고, 지니고 있던 일부 성향이나 습관이 시간의 경과에 따라 바뀌게 된다. 하지만, 수많은 윤회 속에서 계속되던 대부분의 성품은 그대로 유지되는 것으로 보인다.

 

불경에서 보여 주는 석가모니의 조용함, 성경 속 예수의 단호함, 그리고 기록에 남아있는 원효대사의 활달함은 깨달음이란 결코 같은 성품을 가지게 됨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깨달음에 이르면 인식능력은 크게 확대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주의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이해되거나 정리되는 것도 아니다.

깨달음의 가장 큰 의미는 내가 누구이며 나는 이 세상에 왜 왔는지를 알게 되는 것이지, 광대무변의 우주에 대해서 금방 잘 알게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또한 깨달은 자라고 해서 반드시 다양한 초능력을 발휘한다든지 혹은 육체적 고통으로부터 완전한 자유로움을 얻고 생사를 마음대로 할 수 있음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80세에 이른 석가모니가 식중독으로 인하여 열반하시게 되었다는 사실은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성인은 태어날 때부터 일반 사람들과 크게 다르다는 인식도 잘못된 것이다. 태어날 때 특별한 태몽이 있었다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만, 어떤 성인은 특별하게 출생하였다는 이야기들은 후세 사람들이 꾸며낸 것으로 짐작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부모의 정자와 난자가 결합되어 10달 가까이 엄마의 자궁 속에서 자라다 태어나야 하는데, 이 과정을 거치지 않고 동정녀로부터 태어났다든지 혹은 출생 시 어머니의 오른쪽 옆구리로 나왔다는 이야기들은 성인들을 미화시키는 과정에서 빗어진 것이다. 육신을 가진 인간이라면 누구나 육체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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